한반도 분단을 만든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최후
'펑더화이'는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로 근, 현대 중국사에서도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또한 '펑더화이'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최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을 원점으로 돌렸다는 공적으로 휴전 이후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겸임했다고 합니다. 또한 '펑더화이'가 국방부장을 지냈던 1955년에는 중국군에 계급제도를 도입했으며 자신은 중국군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끝났 후 195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열린 루산 회의에서의 발언은 '펑더화이' 자신의 인생을 비극적인 운명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펑더화이'는 루산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 농촌 시찰을 하기 위해 농촌 마을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회의 기간 중 마오쩌둥에게 서신 형식으로 '대약진운동'에 대한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했는데요. 하지만 펑더화이가 보낸 서신은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했지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서신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1966년 마오쩌둥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들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펑더화이'는 홍위병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펑더화이'는 1966년 12월 27일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백번이 넘는 심한 고문을 받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문 이후 '펑더화이'는 1973년 베이징 감옥으로 끌려갔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1974년 11월 29일 암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펑더화이 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 공산당 창립멤버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펑더화이는 1978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그의 사건에 대해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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