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연합군을 후퇴시킬 수 있었던 이유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은 북한측으로 참전하여 현재의 한반도 형태를 만들어 낸 당사국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연합군을 후퇴시킨 결정적인 전략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김일성의 지원요청을 받은 중국 수뇌부는 긴 토론 끝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참전 결정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적이 10만 명이라면 우리는 1명을 더 보내서 승리한다라는 포스터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실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신생국가로 유능한 군사지휘관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의 군사지휘관들은 이론적으로도 군사지식에 대해 빠삭했지만 2차 국공내전으로 인해 실전 경험이 빠삭했던 것인데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펑더화이'는 당시 중국 공산당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펑더화이'는 참전 이후 연합국의 약점인 행군, 폭격지원에 대한 의지 등을 파악하여 연합군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중공군이 연합군의 약점을 파악하자 중공군은 '보병우회기동전술'을 펼치며 연합군을 포위 후 섬멸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대부분은 국공내전의 경험이 있는 베테랑 병사들이었고 그들은 중국 대륙을 행군하며 이동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른 행군속도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연합군을 남쪽으로 후퇴시킨 전략은 꽹과리를 이용한 심리전과 중공군의 빠른 행군 속도를 이용한 포위전술이라는 것인데요. 이러한 중공군의 행군속도를 이용한 포위전술은 연합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는 것은 정설이라고 할 수 있습합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십 만명의 병력이 빠른 행군속도를 이용하여 포위 후 선멸하는 전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지역이 되었지만 당시 '펑더화이'의 연합군의 약점 파악은 신의 한수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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