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이순신 장군 본인이 살아돌아와도 민망하겠다 싶을 정도로 칭송에 칭송을 거듭하고는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전사 이후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왕이나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입니다. 또한 중국의 인물들에게 역시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순신 장군 이전까지 군사 문제에 대한 비교 기준은 손빈, 한신의 계책, 송나라 악비와 같은 중국 장수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다고 하는데요. 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도 있었으며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중략)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 <조선왕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 -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후략)
- 이항복, <충민사기> -
수군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 <달천몽유록>, 1600년경 쓰여진 소설 -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 류성룡,<징비록> -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42]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뿐이다.
-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거인(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 서평(李西平: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윤휴,<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 -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효종,<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1659년 윤 3월 30일 -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 숙종 <현충사 제문> -
이순신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 박문수, <조선왕조실록> 영조 26년/1750년 7월 3일 -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 원중거, <승사록> -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 정조, <홍재전서> -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문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 정약용, <경세유표> -
<글쓴이 추천 글 링크>
CNN,BBC,AFP통신 한국의 200만 촛불집회 외신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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